본문 바로가기
그거 알아?/문학 책 시

가을시 모음 - 이해인

by sk2nd 2025. 9. 16.
반응형

가을시 모음 - 이해인

가을은 시인들의 영감을 가장 깊게 자극하는 계절입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길게 드리워진 햇살, 황금빛 들판은 인간의 내면을 고요하게 흔들며 사랑, 신앙, 이별, 감사 같은 근원적 감정을 불러옵니다. 특히 수녀이자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해인은 가을을 배경으로 삶과 기도의 의미를 탐구하고, 인간의 성숙과 내면의 깊이를 시로 담아냈습니다.

이해인 가을시 모음

이번 가을시 모음 글에서는 이해인 시인의 가을 관련 시들을 원문 대신 요약하고, 감상과 해설을 덧붙이며, 시인의 프로필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가을바람

숲과 바다를 흔들다가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깨우는 바람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놓고
햇빛과 손잡은
눈부신 바람이 있어
가을을 사네

바람이 싣고 오는
쓸쓸함으로
나를 길들이면
가까운 이들과의
눈물겨운 이별도
견뎌 낼 수 있으리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과 기도의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모든 말
깊이 접어두고
침묵으로 침묵으로
나를 내려가게 하는
가을바람이여

하늘 길에 떠가는
한 조각구름처럼
아무 매인 곳 없이
내가 님을 뵈옵도록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바람이 있어

나는
홀로 가도
외롭지 않네

이 작품은 가을바람을 단순한 계절적 현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숲과 바다를 흔드는 바람은 결국 내면에 스며들어 인간의 영혼을 깨우고 단련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꽃이 진 자리에서 열매를 키워내듯, 가을바람은 쓸쓸함 속에서 성숙과 인내를 선물합니다. 시인은 바람을 통해 이별의 고통을 감내할 힘을 얻고, 침묵 속에서 더욱 깊은 성찰과 기도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지막 부분의 "홀로 가도 외롭지 않다"는 태도는 신앙인의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감상: 이 시는 쓸쓸한 바람을 견디는 마음의 힘을 강조하며, 신과 만나는 과정으로 연결됩니다. 바람이 곧 영적 안내자가 되는 구조는 이해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나뭇잎 러브레터

당신이 내게 주신
나뭇잎 한 장이
나의 가을을
사랑으로 물들입니다.

나뭇잎에 들어 있는
바람과 햇빛과
별빛과 달빛의 이야기를
풀어서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한 장의 나뭇잎은
또 다른 당신과
나의 모습이지요?

이 가을엔 나도
나뭇잎 한 장으로
많은 벗들에게
고마움의 러브레터를
쓰겠습니다.

가을의 낙엽을 사랑과 감사의 편지로 비유한 작품입니다. 한 장의 나뭇잎은 단순히 떨어진 자연물이 아니라, 바람과 햇살, 달빛과 별빛의 이야기를 품은 선물이며,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나뭇잎을 건네는 행위는 곧 사랑을 전하는 행위로 확장되며, 시인은 이 계절에 자신도 나뭇잎처럼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감상: 이해인 시인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은 작은 사물에서 거대한 의미를 끌어내는 능력입니다. 나뭇잎을 사랑과 고마움의 매개체로 승화시키는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감동을 줍니다.


가을에

가을에
바람이 불면
더 깊어진 눈빛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겠습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물들면
더 곱게 물든 마음으로
당신이 그립다고
편지를 쓰겠습니다

가을에
별과 달이 뜨면
더 빛나는 기도로
하늘을 향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을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더 넓게 사랑하는
기쁨을 배웠다고
황금빛 들판에 나가
감사의 춤을 추겠습니다

이 작품은 가을이라는 계절의 변화를 사랑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바람이 불면 사랑을 고백하고, 나뭇잎이 물들면 그리움을 편지로 남기며, 별과 달이 뜨면 기도로 승화합니다. 사랑은 점차 개인적 감정을 넘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한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되고, 시인은 황금빛 들판에서 감사의 춤을 추는 장면으로 마무리합니다.

감상: 이 시는 사랑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인류애와 신앙적 사랑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해인의 시 세계에서 ‘당신’은 특정한 연인을 의미하기보다는 신과 사랑 자체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사랑의 기쁨을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신과 연결하는 고백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익어가는 가을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짧지만 울림이 큰 시입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익듯, 인생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고 사랑으로 무르익습니다. 시인은 이 과정을 행복이라 부르며, 말없이 드리는 기도와 같은 고요한 성숙을 찬미합니다.

감상: 삶의 성숙을 가을의 익음에 비유한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화려함이 아닌 침묵과 기도 속에서 피어나는 성숙의 미학이 돋보입니다.


가을 일기

잎새와의 이별에
나무들은 저마다
가슴이 아프구나

가을의 시작부터
시로 물든 내 마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에
조용히 흔들리는 마음이
너를 향한 그리움인 것을
가을을 보내며 비로소 아는구나

곁에 없어도
늘 함께 있는 너에게
가을 내내 단풍 위에 썼던
고운 편지들이
한 잎 한잎 떨어지고 있구나

지상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붉게 물들었던 아픔들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려
새로운 별로 솟아오르는 기쁨을

나는 어느새
기다리고 있구나

이 시는 잎과 나무의 이별을 인간의 사랑과 그리움에 빗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은 곧 그리움의 상징이 되고, 단풍 위에 쓴 사랑의 편지는 낱낱의 추억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붉게 물들어 결국 새로운 별로 솟아오르는 기쁨으로 전환됩니다.

감상: 이별의 아픔조차 성숙과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관점이 돋보입니다. 낙엽이 땅에 떨어지는 과정을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별로 솟아오름’이라는 초월적 변환으로 그려낸 부분은 이해인의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냅니다.


가을 편지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나뭇잎들

춤추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을 지켜보듯이

늦가을의 산에서 낙엽을 바라보며 죽음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작품입니다. 시인은 낙엽을 춤추며 사라지는 무희에 비유하며, 죽음조차 삶의 일부이자 예술적 장면으로 바라봅니다. 조금은 서운하지만 매일 조금씩 흘러가는 시간과 마주하며,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감상: 죽음을 소멸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귀결로 받아들이는 이 시는 인간의 덧없음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순환의 일부로 바라보는 관점은 신앙시로서도, 철학적 서정시로서도 읽힙니다.


시인 프로필 - 이해인

이해인 시인

  • 출생: 1945년 강원도 강릉
  • 본명: 이해인
  • 직업: 수녀, 시인
  • 등단: 1968년 《여상일시》 발표로 문단에 이름을 올림
  • 특징: 종교적 영성과 서정성을 결합한 작품을 다수 발표
  • 주요 주제: 사랑, 기도, 감사, 침묵, 성숙
  • 주요 저서: 시집 《민들레의 영토》, 《작은 기쁨》, 《희망은 깨어 있네》 등
  • 문학적 의의: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영성과 위로의 언어로, 종교적 독자를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시인

결론

이해인 시인의 가을시는 단순한 계절의 노래가 아니라 인간 내면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가을바람, 낙엽, 황금빛 들판 같은 자연의 풍경은 그의 손끝에서 사랑과 신앙, 성숙과 죽음을 성찰하는 상징으로 탈바꿈합니다. 작품마다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는 ‘성숙’과 ‘기도’, 그리고 ‘사랑의 확장’입니다. 개인적 감정에서 출발해 신앙과 공동체, 우주로 확장되는 사랑의 울림은 독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깊은 사색을 안겨줍니다.

이해인의 가을시는 결국 우리에게 말합니다. 삶은 쓸쓸할 수 있지만, 그 쓸쓸함을 통해 성숙하고, 기도로 깊어지며, 사랑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낙엽이 떨어져도,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시작임을 일깨워줍니다.


반응형